가상화폐가 기대하는 기관장세는 올까?
주식시장의 매매주체를 크게 구분해보면 개인투자자와 기관투자가, 외국인투자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식 시세를 볼 때면 오늘 개인들은 얼마치를 샀고, 외국인과 기관투자가들은 얼마치를 샀는지 보여주는 순매매 동향이라는 데이터가 있습니다.
한 특정 국가에서 운영되고 해당 국가의 감독당국이 규제하는 법에 따라 운영되는 특성을 가진 증권거래소와 달리, 가상화폐시장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앞서 설명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가상화폐시장에서 특별히 외국인투자자를 구분하는 건 무의미합니다. 대신 개인투자자와 기관투자가, 그리고 채굴(마이닝)을 통해 비트코인을 확보하는 채굴자 정도로 매매주체를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때 채굴자는 거래소에서 비트코인 등을 구매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거래소에서는 늘상 비트코인을 매도하는 쪽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가상화폐시장이 상승세를 보인다고 할 때, 이를 주도하는 매매주체는 개인투자자 아니면 기관투자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이 주도하는 장세나 기관이 주도하는 장세는 있어도, 주식시장처럼 외국인투자자가 주도하는 장세는 없습니다. 또한 채굴자가 주도하는 장세도 없다고 봐야 합니다.
가상화폐시장에서 기관투자가가 시세 상승을 주도하는 장세를 ‘기관장세’라고 합니다. 이때 기관투자가에는 헤지펀드부터 간접투자펀드를 운용하는 자산운용사, 자기자본이나 고객 투자자산으로 직접 코인을 사고파는 증권사 또는 투자은행, 연기금 등이 속합니다. 그나마 지금은 연기금이나 증권사, 투자은행들은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케이스가 많지 않으니 대체로 헤지펀드나 자산운용사가 매수세를 주도하는 장(場)을 가상화폐시장의 기관장세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기관장세가 중요한 이유는 기관투자가가 가지고 있는 자금의 특성 때문입니다. 개인투자자들은 대체로 단기적인 수익에 많이 치중하다 보니 다소 투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시세가 막 오를 땐 앞다퉈 사지만, 반대로 가격이 하락하면 이내 매도로 돌아서버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에 비해 기관투자가들은 조금 더 멀리 보고 투자하는 쪽이라 기관 자금이 많이 유입될 때에는 시장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사실 2017년부터 2018년 초까지의 열풍과 냉각기를 목격해본 투자자라면 투기적인 개인 자금이 몰려들어 시장이 상승하는 게 얼마나 불안한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물론 2020년부터 본격화한 주식시장에서의 동학개미처럼 개인투자자들도 중장기적인 투자로 시장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만, 코인시장에서의 개인들은 아직 그렇지 않다고 보는 편이 타당합니다.
2020년 말부터 가상화폐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하자 많은 투자자들과 미디어들은 ‘이제 코인시장에서도 기관장세가 본격화했다’고 흥분했습니다. 이는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니었지요.
‘월스트리트’로 불리는 전통적인 금융회사들은 오랫동안 비트코인이라고 하면 멀리하곤 했습니다. 지난 2017년과 2018년에 비트코인 가격이 뛸 때에도 거들떠보지도 않았죠. 비트코인과 가상자산을 바라보는 금융당국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는 게 가장 우선이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가격 변동성이 워낙 큰 데다 헤지 수단이 신통치 않다 보니 섣불리 고객들의 포트폴리오에 비트코인을 채워 넣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것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비대면 결제의 필요성이 커진 상황에서 막대하게 풀린 돈으로 화폐가치가 떨어지고 자산가치는 높아지는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자 ‘디지털 화폐’ ‘디지털 금(金)’으로 불리는 비트코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그 덕에 비트코인 가격이 오르고, 기관투자가들도 조심스럽게 이를 사서 담기 시작한 것입니다. 2020년 말부터 헤지펀드계의 전설로 불리는 폴 튜더 존스와 스탠리 드러큰밀러 등이 자신의 펀드 자금으로 비트코인을 사기 시작했고,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헤지펀드인 스카이브릿지캐피털과 구겐하임파트너스, 보험사인 매스뮤추얼 등이 잇달아 비트코인투자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2021년 4월에 역사상 최고점을 찍은 비트코인은 이내 하락하기 시작했고, 기관장세라는데 가격은 롤러코스터를 탔습니다. 이는 아직까지 기관장세가 충분히 진전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현재 뉴욕증시에서 기관투자가 비중은 거의 70%에 이를 정도입니다. 국내 증시에서도 기관투자가는 전체 주식 보유액의 30~40%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골드만삭스가 추산한 비트코인시장 내 기관투자가 비중은 고작 2% 남짓하다고 합니다. 기관투자가가 거의 없던 상황에서 조금씩 매수에 가담하니 기관장세 모양새가 나타났을 뿐, 본격 유입이라고 말하긴 민망한 수준입니다.
결국 비트코인이 ‘높은 변동성’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를 떼내려면 기관투자가들이 이 시장에 더 들어와야 한다는 겁니다. 현재 8천억 달러도 채 안 되는 비트코인 시가총액에 비해 금(金)의 시가총액은 네 배에 이르는 3조 달러를 넘습니다. 금시장에서의 기관투자가 비중도 무려 30%가 넘습니다. 비트코인이 진정으로 금을 대체하는 투자자산이 되려면 최소한 금시장만큼의 기관투자가 비중을 가져야 하며, 아직은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2021년 4월 JP모건은 한 보고서를 통해 “현재 비트코인시장에 진입해 있는 투기적인 매니아들이 앞으로 더 늘어나면서 비트코인 가격이 5만~10만 달러까지도 상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이들이 끌어올린 가격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면서 “비트코인에 투자하는 기관투자가 비중이 금시장만큼만 간다면 비트코인 가격은 최고 14만 달러까지도 뛸 수 있다”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비트코인의 가격 변동성이 줄어들지 않는 한 기관투자가들이 포트폴리오 내에 비트코인을 금과 같은 비중으로 편입할 것으로 예상하는 건 비현실적”이라며 “결국 비트코인이 금과 같은 수준으로 변동성이 줄어야 하는데, 그러기까지는 수년간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지금 당장 기관들이 안정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간접투자상품도 그레이스케일 인베스트먼트(Grayscale Investment)의 ‘그레이스케일 비트코인 트러스트*’ 정도를 빼면 딱히 찾아보기 힘듭니다. 본격적인 기관장세까지는 좀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만, 역설적으로는 본격 기관장세가 도래할 기회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레이스케일 비트코인 트러스트
: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그레이스케일 인베스트먼트라는 운용사가 만든 비트코인 간접투자상품으로, 주로 기관투자가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운용자금 전액을 비트코인에 투자함. 2021년 7월 31일 기준 총 운용자산이 250억 달러, 원화 약 28조 8천억 원에 이름
비트코인 초보자를 위한 꿀팁
: 2020년 하반기부터 본격화한 가상화폐 상승랠리 과정에서 기관장세라는 얘기가 많았지만, 여전히 가상화폐시장에서의 기관투자가 비중은 주식시장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입니다. 기관들의 본격 참여를 위한 투자상품은 물론이고 이를 허용할 금융당국의 인식 변화가 필요합니다. 다만 앞으로 실질적인 기관장세가 이 시장에 찾아온다면 가상화폐에 또 한 번의 대세 상승이 올 수도 있습니다.